주요 내용 요약
- 백인천 감독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 위해 지난 16일 천안 단국대병원 장례식장을 찾았다. 각계에서 보낸 조화가 가득했지만, 장례식장 분위기는 조용하고 쓸쓸했다. 빈소에는 김소식 장례위원장과 KBO 직원 외에는 문상객을 손에 꼽아야 했다. 프로야구 시즌이 진행 중이니 방문객이 적었으리라.
- 백 감독은 한국 야구에서 불멸의 기록을 남겼다. 그는 프로 원년인 1982년 MBC 청룡의 감독 겸 4번 타자로 뛰면서 시즌 타율 0.412로 타격왕에 올랐다. 그의 나이 39세 때의 일이다. 우타자인 그는 당시 한국 야구에서는 보기 드물게 밀어치기에도 능했다. 백인천의 밀어치기는 그에게 ‘안타 제조기’라는 별명을 얻게 했다.
- 활짝 웃는 백 감독의 영정사진을 바라보다가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코치로 활약 중인 홈런왕 이승엽이다. 백 감독이 삼성 감독으로 부임했던 96년 이승엽은 프로 2년 차 풋내기였다. 경북고 시절 투수 겸 타자로 활약한 이승엽은 팔 부상으로 마운드에서 내려와 타자로 전업했다. 그때는 전형적인 중장거리 타자. 이승엽의 손목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백 감독은 “홈런을 노리고 보다 적극적으로 스윙하라. 삼진을 당해도 좋다”면서 이승엽의 거포 본능을 일깨웠다. 그 뒤 이승엽은 대한민국 부동의 4번 타자로 태어났다. 나는 그 장면을 현장에서 지켜봤던 행운아였다.
사안의 배경과 현재 상황
백인천 감독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 위해 지난 16일 천안 단국대병원 장례식장을 찾았다. 각계에서 보낸 조화가 가득했지만, 장례식장 분위기는 조용하고 쓸쓸했다. 빈소에는 김소식 장례위원장과 KBO 직원 외에는 문상객을 손에 꼽아야 했다. 프로야구 시즌이 진행 중이니 방문객이 적었으리라.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을 우승으로 이끈 어우홍 전 야구대표팀 감독이 지난 19일 별세했다. 향년 95세.
어 전 감독은 선수 시절 동래중(현 동래고)-성균관대를 거쳐 조선전업 등 실업팀에서 뛰다 은퇴 후 본격적인 지도자 경력을 시작했다. 1981년엔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김재박, 최동원, 선동열 등 스타 군단을 이끌고 아시아 최초로 정상에 올랐다. 특히 결승에서 숙적 일본을 누르는 통쾌한 승리를 거두며 국민적인 인기를 누렸다. 어 전 감독은 그해 체육훈장 기린장과 세계야구연맹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주요 진행 경과와 사실관계
이후 어 전 감독은 프로야구 MBC(1984~1985년)와 롯데(1988~1989) 감독을 지냈다. 지도자 은퇴 후엔 초대 일구회장, KBO 총재 특별보좌역·규칙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 야구 발전에 역할 했다.
KBO는 어 전 감독의 공로를 기려 KBO장으로 장례를 치른다. 이는 지난해 9월 이용일 전 KBO 총재 직무대행, 지난 15일 백인천 전 감독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다. 빈소는 경기도 분당제생병원이고 발인은 21일 오전 5시 30분이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을 정상으로 이끈 어우홍(95) 전 야구대표팀 감독이 19일 별세했다.
20일 한국야구위원회(KBO)에 따르면 어우홍 전 감독은 전날 오후 4시49분 별세했다. KBO는 고인의 공로를 기려 장례를 KBO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지난해 9월 이용일 전 KBO 총재 직무대행, 지난 15일 백인천 전 감독에 이어 세 번째 KBO장이다.
주요 입장 및 핵심 내용
“백 감독은 한국 야구에서 불멸의 기록을 남겼다. 그는 프로 원년인 1982년 MBC 청룡의 감독 겸 4번 타자로 뛰면서 시즌 타율 0.412로 타격왕에 올랐다. 그의 나이 39세 때의 일이다. 우타자인 그는 당시 한국 야구에서는 보기 드물게 밀어치기에도 능했다. 백인천의 밀어치기는 그에게 ‘안타 제조기’라는 별명을 얻게 했다.”
“활짝 웃는 백 감독의 영정사진을 바라보다가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코치로 활약 중인 홈런왕 이승엽이다. 백 감독이 삼성 감독으로 부임했던 96년 이승엽은 프로 2년 차 풋내기였다. 경북고 시절 투수 겸 타자로 활약한 이승엽은 팔 부상으로 마운드에서 내려와 타자로 전업했다. 그때는 전형적인 중장거리 타자. 이승엽의 손목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백 감독은 “홈런을 노리고 보다 적극적으로 스윙하라. 삼진을 당해도 좋다”면서 이승엽의 거포 본능을 일깨웠다. 그 뒤 이승엽은 대한민국 부동의 4번 타자로 태어났다. 나는 그 장면을 현장에서 지켜봤던 행운아였다.”
“토미 존 역시 메이저리그의 역사다. 그는 1963년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뒤 100승 고지를 밟은 에이스급 선수였다. 1974년 팔꿈치 부상으로 그라운드를 떠날 위기에 처했을 때 팔꿈치 인대접합수술 후 믿기지 않는 의지로 그라운드를 누비면서 빅리그 통산 760경기, 288승231패의 기록을 남겼다. 팔꿈치 수술은 이제 ‘토미 존 수술’이라고 이름이 붙었을 정도로 야구선수들에게 흔한 수술이 됐다. 류현진(한화)도 이 수술의 혜택을 받아 지금까지 그라운드를 누비고 있다.”
1981년 국가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어 전 감독은 이듬해 9월 서울에서 열린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김재박, 최동원, 한대화, 선동열 등과 함께 출전했다.
한국은 8승1패로 대회를 마치며 아시아 국가 최초의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어 전 감독은 지도력을 인정받아 그해 체육훈장 기린장과 세계야구연맹 올해의 감독상을 받았다.
프로야구 출범 이후에도 현장에 몸담았다. MBC 청룡(1984~1985년)과 롯데 자이언츠(1988~1989년)의 사령탑을 맡아 KBO리그 통산 177승을 기록했다.
지도자 생활을 마친 뒤에는 1991년 초대 일구회장을 맡았으며 KBO 총재 특별보좌역과 규칙위원장, 원로 자문단 등을 거쳤다. 경기장 안팎에서 한국 야구의 주요 현안을 살피며 원로 야구인으로 활동했다.
빈소는 경기 성남시 분당제생병원 장례식장 9호실(지하 1층)에 마련됐다. 발인은 21일 오전 5시30분이며 장지는 용인평온의숲이다.
향후 전망 및 관전 포인트
1931년생인 어우홍 감독은 한국 야구 1세대를 대표하는 야구계의 ‘큰 어른’이었다. 어린 시절 어우홍은 집에 마침 야구 글러브가 있었던 덕분에, 평소 형제들과 취미로 캐치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야구에 입문하게 되었다고 한다. 1945년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뒤 어우홍은 부산 동래중학교(현 동래고, 당시 학제상 중·고등학교 통합)에 진학하여 2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했다.
아마추어 최고의 투수로서 두각을 나타낸 어우홍은 성균관대와 해군을 거쳐 1960년 실업야구단 남선전기(이후 한국전력)에 입사했다. 당시의 실업선수들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어우홍 역시 선수와 직원 생활을 병행했다. 선수로서는 1964년에 은퇴했지만, 1982년 퇴사할 때까지 직원으로 근무했다. 야구만이 아니라 업무에서도 유능함을 인정받았던 어우홍은 공기업인 한국전력에서 간부까지 승진했다. 동시대 실업야구 선수들과 달리, 어우홍은 어린 시절부터 영어와 일본어에 두루 능통했고 시사에도 두루 박식하여 모르는 것이 없는 엘리트였다고 한다.
선수 생활을 마친 이후 회사 직원으로 근무하면서도 야구 지도자를 병행하며 부산상고와 경남고, 한국전력, 동아대 감독 등을 역임하고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60~70년대 부산 경남 지역에서 야구를 배운 유명 선수 출신들은 거의 대부분 그의 제자였기에, 이후로도 어우홍은 ‘부산 야구계의 대부’라는 명망을 얻게 된다.
당시 어우홍 감독이 지도했던 제자들 중에는 김응용 전 해태 타이거즈 감독, 강병철 전 롯데 자이언츠 감독(이상 부산상고), 김용희 현 롯데 2군 감독, 허구연 KBO 총재(이상 경남고) 등 훗날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거물들이 다수 있다. 또한 국가대표팀과 프로 시절에는 선동열, 김재박, 최동원, 한대화 등 이후 프로야구 1세대를 호령하게 될 슈퍼스타들이 모두 그의 지도를 받은 바 있어 그야말로’ 감독들의 감독’ ‘야구계 전설들의 스승’으로 통한다.
정리하며
‘백인천 감독 빈소에’ 이슈와 관련하여 앞으로 새롭게 확인되는 공식 소식과 진행 상황도 신속하게 전해드리겠습니다.